[스크랩] 흉노족. 돌궐족. 위구르족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유라시아 대륙 초원에는
고대부터 많은 유목민족이 살았다 유목민족은 한곳에 머물러 살지 않고
살기 좋은 땅을 찾아 여기저기 옮겨다녔다
어떤 유목민족은 초원에 커다란 제구글 세우고
주변 농경민을 위협하기도 했다
고대 유목 문화를 일군 스키타이족
스키타이족
BC800년 무렵, 중앙아시아로부터 한 무리의 유목민이 흑해 북동부 지역에 나타났다
스키타이족이라 불리는 이 유목민은 수염을 기르고 귀를 덮는 뾰족한 모자를 썼는데
말을 타고 활을 쏘아 주민들을 내쫓고 그들이 살던 땅을 차지했다
스키타이족은 페르시아 제국의 고민거리였다
당시 그리스와 대결을 벌이던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식량공급지인 흑해 연안을 가로막고자 했는데 기곳을 스키타이족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BC514년 페르시아 제국의 대왕 다리우스 1세는 70만 대군을 이끌고 스키타이족을
공격했다 그러나 한곳에 머물지 않는 유목민을 정복한다는 것은 힘들었다
스키타이 문화의 특징은 흑해에서 멀리 떨어진 중국의 알타이 산맥 지역과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난다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도 비슷한 장신구가 발견되었다
스키타이 유목 문화는 '초원길'을 따라 알타이 산맥과 그 너머에까지 전해졌다
초원길 ㅡ 동양과 서양을 잇는 가장 오래된 길로서 몽골 고원으로부터 흑해 북쪽의
초원 지역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특히 BC7세기부터
BC4세기까지의 스키타이 유목문화는 초원길을 따라 알타이 지역으로
전해졌다
스키타이 유목 문화를 받아들인 알타이족
알타이족
중국의 알타이 산맥 지역에서 우리 나라에까지 전해졌다
최초로 몽골 초원을 통일한 흉노족(유럽에서는 훈족이라고 불렀다)
흉노족. 훈족 (BC9세기 ㅡ 남흉노는 BC48년에 중국 한나라에 투항, 216년 멸망..
북흉노는 115년 몽골계 선비족에게 멸망당하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에 스키타이족이 있다면 동쪽에는 흉노족이 있었다
흉노족은 항상 넓은 지역을 옮겨 다니며 사느라 여러 민족이 뒤섞인 혼혈인이 된다
BC9세기 무렵부터 중국의 국경을 넘나들며, 부족한 식량과 물건을 빼앗았다
BC4세기에 중국은 수십 개의 작은 나라로 나누어져 서로 다투는 동안
흉노족은 여러 부족이 단결해서 힘을 키웠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는 먼저 흉노족을 공격하고 5,000Km에 달하는
만리장성을 쌓았다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설 무렵
묵특이 흉노족의 선우가 되면서 몽골 고원지역에 사는 거의 모든 부족을 통일하여
유목 민족 최초의 제국을 세웠다
묵특(? - BC174) BC209년부터 BC 174년까지 흉노 제국을 이끈 선우
주변 유목 민족을 정복하여 최초의 유목 제국을 세우고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정복했다
선우 ㅡ 흉노 제국 최고 군주의 호칭 . '선우'란 '하늘에서 태어난 대군주'의 준말로
여러 씨족 대표들의 승인을 통해 그 지위를 인정받았다
선우 자리는 맏아들이나 형제가 이어받았다
선우 아래에는 좌현왕과 우현왕이 있고, 좌현왕은 보통 태자가 맡아
선우가 죽으면 그 지위를 계승했다 . 선우는 중앙 지역을 다스리고
좌현왕(태자)은 동부를 , 우현왕은 서부를 다스렸다
한나라는 공주를 선우에게 시집보내고 매년 곡물과 비단을 흉노 제국에 바치는 조건으로 위기를 넘겼다
흉노 제국은 서쪽으로도 진출하여 중앙아시아의 여러 오아시스 도시들을 정복했다
오아시스 지역은 동양과 서양을 오가는 비단길의 주요 길목에 있어서
오고 가는 상인도 많고 이들을 노리는 유목민들도 많았다
흉노족은 이곳을 지나는 상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대신 이들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였다 또 한나라로부터 빼앗아 오거나 조공으로 받은 비단을 장사에
뛰어난 오아시스 민족을 통해 팔았다
로마의 유리 제품과 아라비아의 향료 등이 중국의 비단과 교환되면서
비단길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아시아 대륙 초원 지대에 대제국을 건설한 흉노족은 비단 길 경제를 완전히 장악하여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흉노 제국은 60여 년 한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BC141년 한나라 무제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한나라 무제는 흉노족을 직접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더 서쪽에 있는 오아시스
지역으로 진출해서, 먼저 흉노 제국의 교역로는 막았다
이어 흉노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유목 민족을 부추켜 흉노족과 싸우게 하면서
동시에 이들과 손잡고 흉노족을 공격하였다
한나라는 십여 년에 걸쳐 6차례나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한나라뿐만 아니라 흉노 제국도 한나라와의 전쟁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는다 총 인구 100만 명 가운데 약 20만 명이 죽고, 경제의 바탕인 가축을 수천 마리나
빼앗기고, 남서 지방의 비옥한 땅을 빼앗겼다
투루판, 쿠처 등의 오아시스 도시 국가 지역을 한나라에 빼앗김으로써
중요한 동서 교역로인 비단길의 지배권을 잃어버렸다
이에 쇠퇴의 길로 들어선 흉노 제국의 분열은 걷잡을 수 없었다
권력 다툼으로 내분이 일어나고 세력 경쟁에 진 일부 세력은 한나라에 투항한다
이로써 한나라에 항복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BC48년 쯤 남흉노와 북흉노로 나뉘었다
남흉노는 한나라에 항복을 하고 북흉노는 끝까지 한나라에 맞서 싸운다
그뒤 북흉노는 한나라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나날이 쇠약해지고
115년에 몽골계 유목민인 선비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만다
한나라 황제에게 충성하는 군대 역할을 하던 남흉노 역시 극심한 혼란을 겪다가
부족별로 뿔뿔이 흩어져 이전의 유목 생활로 돌아갔다
216년 남흉노의 멸망으로 유목민이 세운 최초의 제국 흉노 제국은 사라진다
약 400년 동안 계속되던 흉노 제국이 무너지자, 흉노족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 중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4세기 후반 유럽 지역에 이르렀는데
유럽 사람들은 이들을 훈족이라고 불렀다
유럽 사람들 눈에 비친 훈족은 말과 한 몸인 듯 쏜살같이 움직이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훈족이 볼가강과 돈 강을 건너자 용맹함을 자랑하던 게르만족조차 두려움에
떨며 로마로 도망쳐 들어갔다
훈족은 헝가리 초원으로 밀고 들어가 다뉴브 강 북부를 차지하고 , 훈 제국을 세웠다
훈족 ㅡ 4-5세기에 활동한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
로마 인들은 '훈족은 키는 작고 체구는 단단하다 어릴 때 얼굴에 깊게 상처를 내서
괴물처럼 보인다 넓은 얼굴에 낮은 코, 튀어나온 광대뼈, 움푹 들어갔으나 독수리처럼
빛나는 눈이 특징이다 훈족은 가축을 데리고 다미녀 말안장 밑에 고기를 넣어 두었다가
부드럽게 만든 다음에 양념도 치지 않고 먹는다'고 기록을 남겼다
5세기 중엽, 훈 제국의 왕 아틸라는 정복 활동으로 유럽 전역에 이름을 떨쳤다
특히441년에는 훈 제국이 요구하는 조건에 잘 따르지 않는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했다 이에 놀란 비잔티움 제국은 다뉴브 강 주변의 땅과 많은 돈을 내놓는 조건으로
훈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비잔티움을 굴복시킨 아틸라는 이번에는 서로마 제국을 점령하기 위해 452년 군사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쳐들어간다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을 바로 눈앞에 두고
교황의 중재로 황제의 딸과 많은 공물을 받고 철수한다
그러나 453년 아틸라가 죽자 뛰어난 통치자가 없는 훈 제국은 빠르게 몰락한다
전쟁에 지친 이들은 각 부족별로 흩어져 남러시아의 초원으로 되돌아간다
훈 제국은 순식간에 무너졌지만, 훈 족이 유럽에 미친 영향은 아주 컸다
훈족에 밀려난 게르만족이 서로마 지역으로 옮겨 가 정착하면서 서로마가 멸망했고
게르만족은 유럽 민족의 뿌리가 되었다
훈 족
훈 족은 한 곳에서 땅을 부치지 않고 가축들이 풀을 뜯을 곳을 찾아 다니며 사냥하는 유목민이었다
오래전부터 중앙 아시아 초원에는 여러 부족들이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며 살았다
훈 족은 커다란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잠시지만 머물 곳에는 둥그런 천막을 세웠다
그들은 언제나 말과 함께 나타나서
마치 말 위에서 사는 것처럼 보였다
훈 족은 말을 타고 전투하는 능력이 세계 최고였다
또한 당시 서양에는 보급되지 않았던 등자와 리플레스 활을 사용했다
등자 ㅡ 말을 탈 때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만든 안장에 달린 발 받침대
리플렉스 활 ㅡ 예전의 활은 일자의 대를 구부려 시위를 걸었다면
리플렉스 활은 반대로 구부러진 활대를 당겨 시위를 걸었기에
탄성이 좋아서 덜 멀리 활을 쏠 수 있었다
375년 훈 족은 중앙아시아를 벗어난 최초의 공격을 시도한다
그들은 볼가 강을 지나서 유럽의 게르만 족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게르만 족은 남쪽으로 대이동하게 된다
훈 족의 유럽 원정을 이끈 아틸라는 오늘날까지도 유럽 인들에게
몽골의 칭기즈칸과 더불어 끔찍한 악마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아틸라는 로마로부터 우수한 문물을 도입하려 노력했고
자신을 방문하는 외교사절에도 늘 친절했다고 한다
4세기 말 , 훈 족은 동쪽에서 유럽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와서
사람들을 잡아가고 도시를 짓밟아싸
동유럽 전역은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다
훈 족은 더 무섭게 보이려고 자신들의 얼굴을 칼로 그었다
또 둥근 모자를 쓰고 아마포(리넨)와 마멋 가죽을 기워 만든 기괴한 옷을 입고 다녔다
마멋 ㅡ 다람쥐처럼 생긴 작은 토끼만한 동물
정착지가 없었던 훈 족은 늘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그들은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왔으며
말 위에서 생활하는 것 같았다
그 말들은 키가 작고 털이 텁수룩했는데 혼자서도 초원에서 살 수 있었다
훈 족은 말을 타고 전투하는 능력이 세계 최고였다
그들이 그 특별한 재능을 어느 지역에서 어떻게 발휘하는지에 따라
유럽의 역사가 뒤바뀌었다
한편, 이들 훈 족이 중국인에게 알려진 흉노족이라는 말이 있으나 ,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훈 족 가족들은 커다란 마차를 타고 유목 생활을 했다
그 마차의 바퀴는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테를 쇠로 둘렀을 만큼 문명의 발전 정도는 뒤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한 곳에서 땅을 부치면서 사는 농부가 아니어서
가축들이 풀을 뜯는 곳을 찾아야 했고
음식을 얻기 위해 사냥을 해야 했다
훈 족의 지도자들은 부인을 여럿 두었다
첫 번째 부인과 자식들은 당시의 장자 중심이던 여느 사회에서처럼 특별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훈 족은 말꼬리의 털을 엮어 만든 둥근 천막집에서 살았는데
천막이 여러 개 모이면 막사를 이루고
막사가 모여 씨족이 되었다
씨족이 모여면 부족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상생활에 바탕을 둔 종교를 믿었다
물, 불과 달에게 제물을 갖다 바쳤으며
여행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길의 신을 숭배했고
특이한 동물들도 숭배했다
훈 족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과 무기였다
말을 탈 때 편안하도록 안장을 나무로 만들었고
전사들은 여러 마리의 말을 함께 몰고 다니면서 말이 지치면 다른 생생한 말로 갈아탔다
그들은 긴 양날의 칼과 올가미밧줄을 가지고 다녔다
또한 리플렉스 활을 사용하였는데 활이 많이 휘어질수록 더 많이 잡아당길 수 있고
화살이 더 멀리 날아갔다
화살은 약 153m를 날아가서 적군을 죽였다
훈 족은 등자를 사용했다
등자는 안장에 달고 말의 양쪽 옆구리로 늘어뜨려
말을 탈 때 양발을 디디게 되어 있는 마구다
그래서 말을 몰 때 두 손이 자유로울 수 있었다
훈 족은 적군에게 쫓기듯이 앞으로 달아나다가도
등자를 밟고 일어서서 뒤로 화살을 쏘아대니 적군은 깜짝 놀란 채
화살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용사이자 협상가
376년에 훈 족은 다뉴브 강 북쪽에 있던 고트 족을 공격했다
서고트 족은 강 너머 로마제국까지 달아났지만
훈 족은 뛰어난 전략뿐 아니라 칼과 활을 이용한 놀라운 공격술로
서고트 족을 정복했다
395년 겨울에는 처음으로 로마제국을 공격했다
권력과 약탈에 목마른 훈 족은 얼어붙은 다뉴브 강을 건너 로마의 트라키아와
달마시아 지역을 공포에 떨게 한다
그 다음에는 남쪽과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지금의 중동 지역을 침략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훈 족은 유럽 중부까지 장악한다
그러나 때로는 로마 인들과 협상도 벌였다
로마인들은 때에 따라서 금을 주고 평화를 사는 편이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훈 족에게 금으로 로마 상품을 살 수 있도록 허락한 전술이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훈 족은 부유한 로마 인을 인질로 잡아 몸값을 요구한다
그들이 다시 길을 때까지 인질을 감옥에 가둬두었다
그런데 인질 중에는 나중에 로마 장군이 된 아에티우스도 있었다
블레다와 아틸라 형제
5세기 초, 대부분의 훈 부족들은 헝가리 평원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의 우랄 산맥부터 서유럽의 큰 강까지 지배하고 있었다
이때 훈 족의 지도자였던 루길라는 여러 훈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루길라의 군대는 다뉴브 강 하류에서 로마 군을 무찌르고 트라키아까지 침입했다
트라키아 ㅡ 발칸반도 남동부에 있는 지방
터키와 그리스 부근
이에 위협을 받은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루길라에게 일 년에 금 160Kg을 공물로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를 약속받는다
11년 후 훈족은 로마 장군 아에티우스를 도울 군사를 파견한다
아에티우스는 한 때 훈 족에게 인질로 잡혔던 인물이지만
이제 그들은 친구가 되어 있었다
훈 족의 군사적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아에티우스는 로마 제국의 일부분을
루길라에게 떼어주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헝가리 땅이다
자신들만의 땅 없이 오랜세월을 유목과 정복으로 지낸 훈 족에게
마침내 논란의 여지가 없는 고국이 생긴 것이다
그들은 이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후 434년 루길라가 죽고 그 후 훈 족들은 루길라의 사촌인
블레다와 아틸라의 지도를 받는다
아틸라가 권력을 장악하다
블레다와 아틸라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동로마 제국이 평화유지비를 제대로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을 탄 채 시작된 협상이 성공리에 마무리되어서
로마와 훈 족은 마거스 조약을 맺었다
로마는 훈 족에게 금과 물건을 거래할 권리를 주고
훈 족 포로의 석방을 약속했다
이 평화조약 덕분에 블레다와 아틸라는
알프스 지역과 지금의 독일 라인 강 부근 정복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5년 뒤 평화는 깨졌다
훈 족은 마거스 주교가 로마 인들의 훈 족 무덤 도굴을 도왔다고 주장하며
주교에게 목숨을 건지고 싶으면 마거스의 성문을 열어두고 떠나라고 한다
그 결과 훈 족은 열린 성문으로 당당히 들어가서
도시를 차지하였다
계속된 정복활동 끝에 아틸라와 블레다는 발칸 반도 대부분을 장악한다
그러나 두 형제는 성격이 너무 달라서 늘 의견이 엇갈렸다
445년에는 그 불화가 최고조에 달하여
아틸라는 블레다를 살해하고 훈 족의 단독 지도자가 되었다
로마의 문물을 존중한 아틸라 왕
아틸라는 한때 로마의 인질이었던 게 분명하다
로마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틸라는 훈 족이 큰 힘을 가지게 된다면 이 뛰어난 사회에서 문물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참모진을 대부분 외국인으로 구성했고
방문하는 외교사절단에게도 친절하게 대했다
그렇다고 아틸라가 자신의 목표인 정복전쟁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까지도 유럽 인들은 몽골의 칭기스칸과 더불어
훈 족의 아틸라를 끔찍한 악마의 이미지로 떠올린다
로마의 역사학자 프리스쿠스는 아틸라가 세계의 여러 인종을 섞어놓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했다
아틸라에게 청혼한 로마 황제의 누이
447년에 아틸라는 권력을 강화하고 전리품을 얻기 위해 발칸반도의 나머지 지역까지 정복한다
땅을 뒤흔드는 지진과 지독한 폭풍이 길을 막았지만
아틸라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당시에는 거의 유럽 전체가 아틸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각지에서 얻은 전리품과 로마가 바치는 공물인 금 덕택에 훈 족과 아틸라는 부유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틸라의 계획에도 문제가 생긴다
서로마 황제의 누이 호노리아 때문이다
호노리아는 헤라큐러너스라는 부유한 원로원 회원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으나
그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호노리아는 하인을 통해 아틸라에게 반지와 편지를 보내서
자신을 구해 달라고 간청한다
호노리아가 쓴 편지의 진짜 의미는 이러했을 것이다
저와 결혼해 주신다면 저는 당신을 도와 서로마제국의 절반을 바치겠습니다
동로마 서로마 황제는 권좌를 포기할 뜻이 없었는데도
아틸라는 그러리라 믿었다
아틸라는 두 황제에게 편지를 썼다
호노리아와 결혼하겠소..나에게 서로마제국의 절반을 주시오
황제들은 거절했다
갈리아 전투
훈 족은 갈리아와 서고트 족을 정복하려고 했다
한편, 호노리아의 반지를 받은 아틸라에게 화가 나 있던 서로마황제는
로마 군을 보내 서고트 족을 도왔다
이때 로마 군의 지도자는 아틸라의 친구였던 아에티우스였다
서유럽의 모든 군대가 아틸라에 맞서 싸웠다
451년 6월 14일
훈족은 결국 오를레앙 시에서 후퇴했고
일주일 뒤에는 살롱에서 패했다
전설에 의하면 아틸라는 후퇴하여 마차부대를 거점으로 삼고
나무안장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만약 적들이 마차부대를 뚫고 오면 아틸라는 나무안장에 불을 붙이고
그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에티우스가 서고트 족을 본국으로 퇴각시켜
훈 족이 달아날 통로를 만들어주었다
아에티우스는 아틸라와 훈 족 군대를 전멸시키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훈 족은 자신과 로마 인들에게 여전히 쓸모가 있었던 것이다
아틸라는 신이 내린 천벌
동로마제국에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다
새 황제의 이름은 마르치안으로
훈 족에게 평화의 대가 내는 것을 거절한다
아틸라는 화가 났지만 동로마보다는 갈리아에서 자신의 패배를 도운
서로마인들에게 감정이 더 많았다
아틸라는 서로마에 있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침략해 만투아 시가 있는 남쪽까지 파괴한다
452년 여름 그곳에서 아틸라는 교황 레오 1세가 이끄는 사절단을 만난다
이 만남은 아에0티우스가 주선한 것이다
교황은 아틸라를 <신이 내린 천벌>이라고 불렀고
신이 내린 천벌은 아틸라의 별칭이 되었다
17세기까지 유럽에서 모든 돌림병과 이민족의 침략, 세기말적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그는 그 모두를 일으킨 장본인이자, 지옥에서 돌아온 어둠의 제왕으로 불렸다 아틸라 때문에 촉발된 게르만 족의 대이동은 로마제국을 멸망으로 이끈다
신성한 도시인 로마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신이 은혜를 베풀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미 아틸라는 로마를 공격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탈리아 전 지역이 굶주리고 있는데다
흑사병이 돌고 있었다
흑사병 ㅡ 쥐가 옮기는 치명적인 전염병
아틸라는 자신이 맞서 싸울 수 없는 돌림병이란 적에게
자신의 군대를 잃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는 이미 병사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유럽을 다시 그린 훈 족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아틸라는 또 한 번 결혼했다
그런데 결혼식 밤 동맥이 터져 갑작스레 죽는다
아틸라는 헝가리 평원의 티셔 강 유역의 비밀 장소에 묻혔는데
오늘날까지도 그 장소는 아무도 모른다
한편, 훈 족 가운데 아틸라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
아틸라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들은 통치에 소질이 없었다
결국 훈 족은 분열되고 말았다
훈 족은 고트 족을 포함한 여러 세력들을 몰아내서 다른 고세 정착하게 하는 등
유럽 민족 지도를 바꾸어놓은 사람들이다
짧은 역사 속에서 많은 업적을 일궈내지는 못했지만
아틸라는 사람들의 뇌리에 아직도 남아 있다
아틸라의 침입은 로마제국의 몰락을 재촉했고
헝가리 인들은 그를 영우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틸라는 수백 년 동안 연극 , 오페라, 영화에 등장한다
유라시아 초원을 통일한 돌궐족
돌궐족
돌궐족은 흉노족이 인도에 세운 에프탈족마저 무너뜨리고 더 넓은 지역을 통일한다
돌궐제국이 유목 지대와 오아시스를 통일하자
중국과 로마를 잇는 교역 활동은 더욱 활발해진다
돌궐제국은 오아시스 상인들을 시켜 중국에서 비단을 사다 비잔티움에 팔았다
처음에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거쳐 교역했는데
나중에는 더 많은 이윤을 얻으려고 비잔티움 제국과 직접 교역하려고 한다
유라시아는 돌궐제국이 활짝 연 비단길을 따라 다른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552년 돌궐 제국이 일어서다
630년 동돌궐이 당나라에 항복하다
681년 돌궐족이 당나라로부터 독립하다
744년 위구르족이 돌궐 제국을 무너뜨리고 제국을 세우다
흉노족이 떠난 아시아 대류그이 초원은 잠시 몽골계 유목 민족인 '유연'이 지배한다 6세기 초 돌궐족은 알타이 산맥 부근에서 대장장이 일을 하며, 유연에 철제 무기나 도구를 공급해 왔다 그러다가 뛰어난 지도자 부민이 등장하면서, 유연에 맞설 만큼
세력이 커졌다 부민은 도전의 표시로 유연의 공주와 결혼을 요구했으나, 유연은
이를 얕보고 거절했다 부민은 552년에 다른 유목 민족과 손잡고 유연을 멸망시킨
후 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스스로를 초원의 절대 군주를 뜻하는 '카간'이라고 불렀다
돌궐 제국이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민이 죽자, 초원의 관습대로 형제와 자식들이 영토를 나눠 가졌다 제국의 수도가 있는 동부 지역은 부민의 아들 무한이 다스렸고 서부지역은 부민과 함께 전쟁에 나섰던 동생이 다스렸다
서부 지역의 통치자는 카간 대신 제 2의 왕을 뜻하는'야브구'라는 칭호를 써서
서부 지역이 동부 지역 아래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동부 지역의 무한 카간은 주변 민족을 정복하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갔고
넓은 영토 곳곳에 잘 훈련된 10만 명의 군사를 배치하였다
또한 강한 군사력으로 중국을 위협하였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딸을 중국 황실에 시집보내서 화친 관계를 맺기도 했다
서부 지역의 야브구 역시 당시 위세를 떨치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나 비잔티움 제국과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동서 교역로인 비단길의 주요 길목을 모두 장악한다
이리하여 돌궐제국은 동쪽으로는 몽골 고원에서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를 지배하며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며 질주한 돌궐제국의 전성기는 얼마 가지 못한다
제국이 세워진지 불과 30년 뒤, 서부 지역의 야브구가 동부 지역의 카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돌궐 제국은 둘로 나뉘게 된다
오아시스 ㅡ 초원이나 사막 같은 건조 지역에서 물이 나는 곳
물이 있기 때문에 나무도 자라고 약간의 농사를 지을 수도 있다
오아시스는 초원의 교통 중심지로서 물자 교역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유명한 오아시스 도시로서는 사마르칸트, 부하라, 타슈켄트가 있다
사산왕조 페르시아 ㅡ 3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번영을 누리던 페르시아 왕조
비단길 무역 거점이 있는 중앙아시아 서쪽에 있었다
돌궐 제국, 비잔티움 제국과 대립하여 전쟁을 벌였다
유라시아 대륙의 유목민들이 주로 이용한 동서 교역로는 초원길과 사막길이다
초원길은 스키타이 시대 때부터 이용하던 오래된 교역로로 상인들의 물건을 노리는
유목민이 많아서 위험하다
그래서 상인들은 초원길보다 좀 더 험하지만 유목민의 공격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사막길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돌궐족이 교역을 활발히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오아시스 지역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
특히 가장 큰 오아시스 도시인 사마르칸트에 사는소그드 사람들은 충실한 협력자였다 장사는 소그드 상인에게 맡기고 돌궐족은 군사력으로 이들을 보호해주었다
그러나 소그드 상인이 비잔티움 제국에 직접 팔 수는 없었다
비단은 지중해에 도착하기 전에 사산 왕조 페르시아 상인의 손에 넘겨졌던 것이다
돌궐족은 중간에서 이익을 가로채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제치고, 비잔티움과 직접
거래하길 원했다 그래서 비잔티움 제국과 동맹을 맺어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고립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가 더 발전하지 못한 데다가 비잔티움 제국에서도
비단을 생산하기 시작하여, 끝내 유럽과 직접 교역하지는 못했다
소그드 상인은 아랄 해에서 흘러나오는 아무다리아 강과 시르다리아 강 사이의
'소아디아나'라고 불리는 지역에 살았다 (둔황,투루판 등 비단길의 여러 길목에 근거지를 두고 살았다)
이란 계통의 소그드 상인들은 고대부터
사마르칸트, 부하라 등 오아시스 도시에 살았다 이들은 농사도 지었지만
대개 비단길 교역에 나서서 동서 문물 교류에 크게 공헌했다
630년 당나라에 동돌궐 제국이 무너지고
서돌궐마저 당나라에 굴복하자 돌궐족은 당나라의 기마병이 되어 전쟁마다 따라나디는 신세가 되었다
50여 년간 당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당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몽고 고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주변 민족들을 정복해 681년에 다시 제국을 일으켜 세웠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외래 종교와 정착 문화가 퍼지는 것을 억눌러
유목민의 강인한 정신을 이어 가고자 노력했다
유목민으로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말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개발하여
유목민의 전통을 강조하였으나 8세기에 들어서면서 카간 계승을 둘러싼 내분과
다른 유목 민족의 반란으로 힘을 잃었고 결국 위그르족에 의해 멸망당한다
초원에 위구르 제국을 세운 위구르족
위그르족
744년 위구르족이 돌궐 제국을 멸망시키고 제국을 건설하다
750년경 ㅡ 위그르 제국에 마니 교가 들어오다
840년 위그르 제국이 멸망하고, 투르족의 이동이 시작되다
위그르족은 7기 후반까지도 돌궐 제국의 지배를 받던 부족이었다
그러다가 돌궐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켜 744년에 위구르 제국을 세웠다
위구르 제국은 당나라를 도와 고구려 원정에 참여하는 등 다른 유목민들과는 달리
당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755년 당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뒤 위구르와 당나라의
관계는 더욱 두터워졌다
위구르는 당나라에 말을 주는 대신 비단을 얻어 와 큰 이익을 남겼다
당나라와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되면서 위구르에는 정착민의 문화가 생긴다
당나라에서 시집온 공주와 그 일행이 머물 궁전이 지어졌고
위구르의 보호 아래 교역을 담당하던 소그드 상인을 위한 집도 마련되었다
위구르족은 여러 곳에 도시를 건설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겨울 수도인 카라발가순(오르콘 강 주변에 세워졌다)
750년 쯤 위구르 제국은 절친한 관계에 있던 소그드 상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마니 교도 함께 받아들였다
마니 교는 육식과 유제품을 먹지 못하게 하고, 평화를 위해 전쟁을 반대하는 등
유목민 고유의 생활양식 자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정착 민족의 종교를 믿게 된 위구르 사람들은 더 이상 초원 지대를 고집하지 않고
서서히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이 있는 지역으로 옮겨 가 정착했다
마니교 ㅡ3세기에 페르시아의 마니가 조로아스터 교, 크리스트 교, 불교를 혼합하여
만든 종교이다 미래에 빛의 세상을 오게 할 구세주, 마니를 믿는다
마니교 신자는 몸 안에 있는 빛의 기운을 키우기 위해 술이나 고기를 먹지
않고 아주 엄격한 생활을 했다 '마니아'라는 말은 마니 교 광신도에서 유래.
정착생활을 하던 위그르는 군사력이 약해진 탓에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키르기스족의 공격을 이겨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키르기스족 역시 초원을 통일하지 못하고
초원은 몽골족이 차지한다
위구르 제국을 이루었던 부족들은 몽골 고원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부는 남쪽의 중국으로 들어가 중국 사람들 속에 섞였고
일부는 동쪽의 거란으로 가 기마병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뛰어난 기마병이 되어 요나라(거란족)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한다
서쪽의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이 있던 지역으로 간 무리는 그곳에 정착하여
조그만 왕국들을 세웠다
둔황으로부터 타림 분지의 투루판, 쿠처, 베쉬 발릭 등의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은
모두 위구르족이 차지했다
이들보다 더 멀리 서쪽으로 이동한 무리는 후에 이슬람 교를 받아들여
카라한 왕조 등 몇몇 나라를 세우기도 했다
이란계 주민이 살던 오아시스 지역에 유목 문화가 스며들면서 큰 변화가 나타났다
위구르족은 오아시스 지역에 살던 주민에게 이제까지 사용하던 이란 계통의 언어
대신 자신들이 사용하는 말을 쓰도록 했다
또 오아시스 사람들이 사용하던 문자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만큼은 위구르 제국 시절에 믿던 마니 교를 고집하지 않고
정착 지역의 종교를 받아들였다
불교가 발달한 둔황에 정착한 이들은 불교를 믿었고
타림 분지에 정착한 이들은 불교나 크리스트 교를 믿었다
이처럼 위구르족은 폭발하듯이 흩어져 각기 정착한 지역의 주민과 결합하여
독특한 혼혈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위구르족이 초원 밖으로 이동하면서 이들은 '투르크족'이라는 이름으로
주변 지역에 알려졌다
키르기스족 ㅡ기원전부터 몽골 초원 북쪽 삼림 지역에 살던 수렵 민족
흉노제국과 돌궐제국, 위구르 제국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840년에
10만 명의 기병으로 위구르의 수도를 공격하여 위구르를 멸망시킨다
그러나 키르기스족은 몽골 초원을 통일하지 못하고 예니세이 강가로
돌아갔다
초원 밖으로 흩어진 투르크족
투르크족
위구르족이 초원 밖으로 이동하면서 이들은 '투르크족'이라는 이름으로 주변 지역에 알려졌다 유라시아 초원에 유목 제국을 세우고, 동서 무역을 장악하던 투르크족은
위구르제국이 멸망하면서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걸쳐 이동을 하였다
투르크족은 주로 정착 지역에 이주해 용병으로 활동했다
이제 투르크족은 이전의 유목 생활을 버리고 오아시스 주변에서 농사를 짓거나
상인이 되어 비단 무역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큰 변화의 물결에 휩싸이는데 그것은 이슬람 교이다
이슬람 교는 7세기쯤 아라비아 반도에서 생겨나, 아랍 민족을 하나로 통일한
새로운 종교였다
이슬람 세력은 급격히 주변 지역에 영향력을 넓혀가더니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는
물론 유럽 일부에까지 급속히 이슬람 교를 전파한다
투르크족과 투르크화ㅡ 유목민은 넓은 지역에 걸쳐 살기 때문에 생김새에 따라
인종을 정확하게 구분하기 힘들다 따라서 유목민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구분한다
투르크 어 계통의 언어를 쓴 유목민을 투르크족이라고 하는데
흉노 족, 에프탈족, 훈 족, 위구르족은 모두 투르크족에 속한다
이들 투르크족이 중앙아시아로 이동하고 정착하면서 그 지역에 투르크 문화를
전파한 것을 '투르크화'고 한다
10세기에 접어들자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지역에도 이슬람의 거대한 물결이
밀려들었다 투르크족이 세운 오아시스 국가 가운데 카라한 왕조가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주변 지역을 정복해 나갔다 곧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와 초원지대까지
이슬람교가 전파되고 곳곳에 이슬람 사원이 세워진다
또 이슬람 교를 믿게 된 많은 투르크 사람이 아랍 인들이 세운 이슬람 왕조의 군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슬람 교는 투르크족을 강하게 단결시켜 주었고 투르크족은
타고난 군사적 재능으로 이슬람 세력의 확산에 기여했다
이렇게 몽고 고원으로부터 시작된 투르크족의 움직임은 유라시아 대륙을 뒤흔들었다
따라서 현재 아시아의 내륙 지역에 있는 많은 나라들은 투르크 계통의 언어를 쓰고
이슬람 교를 믿게 되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카라한 왕조 ㅡ 9세기 중엽에 중앙아시아 일대로 옮겨온 투르크족이 주변 유목족과
힘을 합해 세운 국가이다.960년즘 이슬람 교를 믿기 시작하면서 주변
지역을 정복했다 11세기에는 오아시스 국가들과 종교 전쟁을 벌였으며
중앙아시아 지역의 이슬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서 교통의 중심지였으나 11세기 말에 투르크족이 세운
이슬람 대제국인 셀주크 왕조에 멸망한다